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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2-15 08:40
청화큰스님 -- 열반에 대한 법문
 글쓴이 : 원오사
조회 : 4,944  
♧. 열반[涅槃:Nirvana]: 적멸[寂滅], 불생[不生], 무위[無爲], 안락 [安樂],
                                    해탈[解脫], 원적[圓寂], 영생[永生]

 

♧.열반사덕[涅槃四德]: 상常ㅣ 락樂ㅣ 아我ㅣ 정淨ㅣ
  -.상덕 常德 : 상항불변常恒不變하여 생멸生滅이 없으며 수연화용隨緣化用이 부절不絶함.
  -.낙덕 樂德 : 적멸무위寂滅無爲하여 언제나 안락무우安樂無憂함.
  -.아덕 我德 : 대아大我, 진아眞我의 자실自實함을 말하며 용用에 있어서 팔대자재아를 갖춤.
  -.정덕 淨德 : 일체구염一切垢染을 해탈解脫하여 어떠한 경계에도 오염汚染되지 않음.

 



 

─────────────────────────────────────────────

 

 열반[涅槃]이라.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열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열반涅槃이라 하면 보통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것을 열반이라고 생각들을 하는데, 그러나 죽음만을 열반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번뇌가 다 녹아버리고 나쁜 마음이 다 죽어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나쁜 마음이 다 없어져 버리면 성자聖者가 되겠지요.

 

 본래가 다 부처인지라, 그래서 적멸寂滅이라, 번뇌가 다 녹아버려서 조금도 나쁜 흔적이 없는, 조금도 번뇌의 움직임이 없는 아주 맑고 참다운 진리의 경계를 적멸이라 합니다. 우리가 금생에 죽으면 금생의 업장을 짊어지고 업장業障대로 태어나겠지요. 그러나 업장을 녹여버리면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영생불멸하는 극락세계에서 영생의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또 해탈解脫이라. 번뇌의 허물을 다 벗어버렸다는 얘기입니다. 요새 우리가 자유를 부르짖고 자유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고자 하지 않습니까. 민주화도 자유를 위해서 부르짖지만 참다운 민주화, 참다운 자유는 자기의 번뇌를 다 해탈해 버려야 참다운 자유自由인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감옥監獄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번뇌가 조금도 없다고 할 때는 바로 자유란 말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어서 웬만한 것은 자기 멋대로 다 한다 하더라도 역시 그런 자유는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중생衆生은 번뇌가 있는 한 어느 누구나가 참다운 자유인이 못되는 것입니다. 번뇌를 벗어버려야 참다운 자유인입니다. 번뇌를 벗어나려면 자기라는 생각, 자기라는 아상我相을 떠나야 합니다. 아상을 떠나야 욕심을 버리고 진심嗔心을 버리는 것인데, 자기라는 생각을 못 떠나면 나한테 좋은 것은 욕심欲心을 부리고, 자기한테 싫은 것에는 분노를 나타낸단 말입니다.

 

이런 마음 때문에 우리 마음이 더욱더 어두워집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번뇌煩惱를 벗어버리면 바로 거기가 극락인 것입니다. 위없는 행복이 극락 아니겠습니까. 그 자리는 죽지 않는 영생永生의 자리입니다. 우리 중생은 과거의 업業으로 금생에 태어나고 금생의 업業으로 다시 내생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영생永生이 아닙니다. 항시恒時 죽었다, 살았다, 나고 죽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번뇌를 벗어버리면 아까 말씀대로 중생이 불쌍해서 일부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몸으로 받아 올망정, 우리가 업장에 묶여서 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대체로 과거 전생에 잘 닦아서 금생에 중생이 불쌍하니까 오신 그런 분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앞으로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세계는 지금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평화스럽게 못 됩니다. 우리 한국인에게나 미국인에게나 누구한테나 제일 좋은 선물膳物이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제가 승려라 해서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명예名譽도 필요 없고, 아무 것도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진리의 가르침이 많이 있지만 불교의 팔만 사천 법문 가운데에는 그 모든 진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다른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크라테스[Socrates] 이전에도 역시 자연주의 철학자 탈레스[Thales]라는 철인은 물을 보고서 ‘우주의 근본은 물이다’ 이렇게 말하고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는 ‘우주의 본질本質은 불이다’ 이렇게 말하고 엠페도클레스[Empedokles]는 ‘우주의 본질은 흙 기운이고 물 기운, 바람기운이고 땅기운’ 이라고 말했습니다.

 

각자 철인마다 견해見解가 다 달랐습니다. 또 유물론과 유심론이 있습니다. 유물론唯物論은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 다인 것이다, 어디가 있는 것인가? 또 유심론唯心論은 물질이란 것은 결국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이렇게 옥신각신하며 싸워 온 인류문화사를 다 수용해서 하나의 진리로 똘똘 뭉쳐서 명확하게 풀이한 것이 부처님 진리입니다.

 

 부처님 진리眞理를 안다고 할 때는 자기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며 가정도 편하고 다 편한 것입니다. 천지 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이다, 일원주의一元主義다, 이렇게 분명히 알아버리면 그때는 싸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상대적인 법이 있고, 이분법二分法으로 나누어서 보고 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싫든 좋든 간에 불교의 진리가 세상을 다 덮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일기당천一騎當千입니다. 여러분들 한 분, 한 분이 꼭 천사람, 만 사람을 제도하셔야 합니다. 그런 의무를 여러분들은 타고 나신 것입니다. 학식은 둘째 문제입니다. 자기 행동이 바르면 말을 안 해도 저절로 통通해버리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불심에 사무치면 다 통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열반이라는 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말하는 것이고, 일체존재의 근본성품자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번뇌가 다 가셔버린 자리이며 또는 다시 나쁜 갈래로 태어나지 않고 해탈하여 참다운 자유인 것입니다. 참다운 자유는 항상 열려 있습니다. 거기가 바로 극락이고 다시 위없는 행복입니다.

 

 이 자리는 영생불멸의 자리입니다. 부처님같이 위대한 분은 덕德이 하도 많아서 다 헤아릴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열반의 덕이나 진여불성에 갖추어진 덕은 불가설불가설不可說不可說이라, 이는 위대한 성자가 몇 백 년, 몇 억 년을 헤아려도 그 영생불멸한 우리 마음자리인 진여불성에 갖추고 있는 덕德을 다 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갖추고 있는 덕[德]은 이와 같은 덕입니다. 이러한 덕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캐내는 것보다 더 급急하고도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른 것들은 모두가 하찮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길지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대부분 젊으시니까 잘 모르겠지만 저같이 칠십을 넘어서면 금방입니다. 봄눈 녹듯 금방이지요.

 



 

 여러분들도 이윽고 그렇게 됩니다. 죽음의 물결 속에 잠시 흘러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생명을 절대로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부처가 꼭 되는 것이 우리 생명의 참된 의미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가 다 헛것입니다. 재산을 모으는 것도, 나와 나의 자손과 내 이웃들이 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돈도 모으고 절도 짓고 하는 것입니다.

 

좋은 정치란 것도, 남과 더불어서 부처가 되기 위한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입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열반[涅槃]에 들어있는 덕[德]이 한도 끝도 없는데, 우리 중생들에게 부처님께서 알아듣기 쉽게 네 가지 차원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상락아정이라. 한도 끝도 없는 부처님의 무량공덕인데, 따라서 이 정도는 우리가 알아야 하겠지요.

 

 내 마음에 들어있는 부처님의 공덕이 한도 끝도 없는데, 간추리면 ‘상락아정[常樂我淨]’입니다. 항상 상常, 즐거울 락樂, 나 아我, 맑을 정淨, 이 항상 상常의 뜻이 무엇이냐면 우리 생명이 끊어지지 않고 영생불멸한다는 뜻입니다.

 

 현상적인 것은 무상無常하지만 우리 생명 자체, 근본적인 진여불성 자체는, 즉 열반涅槃은 영생한단 말입니다. 영생이라. 우리 생명이 허망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몸뚱이가 허망해도 물질이 허망한 것이지 우리 생명은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본래 없습니다.

 

 예수만 영생永生한 것이 아니고 석가모니만 영생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가 다 영생합니다. 따라서 우리 본래 마음자리는 영생불멸하는 상[常]이고, 또 안락이라. 우리 마음자리는 영원한 행복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것이 락[樂]이라, 안락安樂입니다.

 

 그냥 우리 중생衆生은 좋은 사람 만나면 기분이 좋고 물질이 많으면 좋다고들 하나, 그런 것은 모두 허망한 안락 아닙니까. 영원히 변치 않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변치 않는 참다운 행복이란 말입니다. 완벽한 행복, 이것이 락樂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 아我라. 이것은 그냥 작고 망령된 소아小我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은 대아大我라. 대아란 무엇인가? 대아는 바로 우주를 나로 한단 말입니다. 불경에 보면은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라. 어려워서 안 내놨습니다만 이 아我 가운데는 팔대자재아라, 모두를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모두를 다 알 수 있는 지혜를 갖추고 있는 아[我]란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지혜가 과거만 보겠습니까. 또는 미래만 보겠습니까. 과거나 미래나 다 볼 수 있단 말입니다. 불경佛經에 보면 우주에서 내리는 빗방울 수까지 헤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성자의 지혜란 것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무소부재無所不在요, 무소불능無所不能이란 말입니다. 성자의 지혜는 능能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지금 원자력 같은 것도 무시무시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은 유가 아니란 말입니다. 원자력도 내내야 근본자리에 가면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 원자력도 상당히 고성능인 것인데, 무한 성능이 우리 불성佛性입니다. 따라서 그 무한 성능이 나한테 갖추어져 있단 말입니다. 성자聖者들의 ‘나’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아[我]는 우리 같은 보통 ‘나’가 아니라, 때가 다 가셔버린 참다운 나란 말입니다. 이 가운데는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 우주를 다 알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며, 자기 몸뚱이를 공중으로 솟아 올릴 수도 있은 것이고, 삼매三昧에 들면 자기 몸에서 불을 낼 수도 있고, 물을 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명대사四溟大師[惟政 1544~1610]가 일본에 갔을 때 가마솥에 불을 넣은 뜨거운 방에서 거처를 하게 만들었단 말입니다. 밑에는 쇠로 된 가마솥이기 때문에 금방 타서 죽겠지요. 그러나 사명당은 삼매에 들어서 얼음을 내니까 방안에는 고드름이 달렸습니다. 사명당이 삼매三昧에 드는 사람이 못 되었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었겠지요.

 

 그러나 사명당四溟堂은 삼매에 들 수 있는 위대한 분이셨기 때문에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느 사람 같으면 뜨거워 타서 죽었을 것인데, 삼매에 들어 얼음을 생각하니 전부가 다 얼음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힘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찮은 몸뚱이,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이 몸뚱이, 우리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과거 전생前生에 이따위 몸이 있었습니까? 죽은 뒤에 이 몸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금생今生에 잠시 뿐이란 말입니다. 하찮은 이 몸뚱이 때문에 속아서 삽니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중생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못 박혀 돌아가신 사실을 생각해 봅시다. 성인들이 무슨 필요로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것인가. 성자라면 그 일들을 다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자聖者가 자기 죽음 하나 마음대로 못하겠습니까. 다만 중생들에게 이 몸뚱이는 허망한 것이고, 몸뚱이는 어느 때 어떻게 되어도 무방하며 인연 따라서 죽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우리 참 생명은 영원한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서, 또 일반 중생들의 죄로 해서 그런 성자를 죽게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성인들을 죽게 해 놓으면 그때는 그 나라는 전체적으로 큰 해를 받습니다. 성자의 마음을 괴롭히기만 해도 큰 해를 받는 것인데, 여러분들이 선량한 행동을 하고 있는데 나쁜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음해해 비방誹謗하면 그 사람들은 틀림없이 해害를 받습니다.

 

우리가 착실하고 훌륭한 행동을 하는데 그 사람들이 음해陰害하고 비방하면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스스로 해를 받아서 잘못되고 맙니다. 그러나 선량한 입장에서 볼 때에 누구나 잘못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은 자기 스스로 지어서 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민족도 역시 그 당시에 그리고 예수가 돌아가신 후에 굉장히 비참한 꼴을 많이 당했습니다. 따라서 나한테 갖추고 있는 능력能力이 빌딩이나 하나 짓고 하늘에 있는 별을 발견하고 하는 그런 정도의 것이 아니라, 한도 끝도 없는 힘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빌딩을 지었다든가, 무슨 책을 몇 권 냈다든가, 그런 것은 자랑거리가 못되는 것입니다. 오직 부처가 되는 것만이 자기 삶의 의의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 외의 것들은 우리가 부처를 이루는 데 있어서 방해妨害가 된다면 손해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했을 때는 다른 사람의 성불成佛을 위해서 공헌한 바가 되겠지요. 아무튼 나라고 하는 것은 조그마한 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나요, 불경佛經에 있는 말로하면 팔대자재아라.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두를 다 알 수 있는 지혜란 말입니다.

 

 누구나가 다 갖추고 있는 것인데, 우리는 지금 계발啓發을 못해서 조그마한 나밖에 못쓰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뇌腦 가운데는 뇌세포가 백억인데 그 십분의 일밖에 못 쓴다고 합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뇌세포 가운데 십분의 일밖에 못 쓰고 죽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참다운 우리 마음은 뇌세포로만 되어 있은 것이 아닙니다. 우주에 들어 있는 정기精氣이기 때문에 무한의 지혜입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을 꼭 깊이 외워두십시오.

 

 마지막 정[淨], 이것은 조금도 번뇌가 없는 청정무비하다는 말입니다. 본래 열반마음은 이와 같이 청정무비[淸淨無比]합니다. 조금도 때가 묻어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잘못 살아서 때를 묻히고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음탕淫蕩한 소설이라든가 또는 별로 좋지 않은 텔레비전 같은 그런 것이 나오면 바로 즉시 꺼버리십시오. 그런 걸로 해서는 우리한테 도움이 못 됩니다. 소중하고 맑은 우리 마음에 무엇 때문에 중생들의 죄罪스런 때를 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손해고 가정적인 손해고 나아가서는 우주적인 손해損害입니다.

 

 한 사람이 잘못되면 그만치 우주宇宙를 오염汚染시킵니다. 우리가 성[瞋]을 내면 그때는 자기 마음이 어두워지고, 그 성을 받는 상대방도 어두워지고 우리 공기空氣도 그마만치 오염됩니다. 천재지변 같은 것도 우리 마음하고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부처님 경전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다 평화平和스럽게 진리를 지키면 천재지변도 별로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쁜 생각을 많이 하고 함부로 행동하고 욕심을 부리고 하면 그것이 우리 주변을 오염시킵니다. 오염시키면 그것이 지진地震이나 지변地變들을 일으키는 요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에이즈 같은 병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잘못 살고 악념惡念들이 깊으니까 에이즈 균菌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자의 깊이란 것은 우주에 두루 다 통하는 것입니다. 청정한 사람한테 무슨 필요로 에이즈가 걸리겠습니까. 우리가 바르게 살면 그런 균들은 우리 사회에 생길 수 없습니다. 음탕하게 동성애고 무엇이고 그렇게 사니까 그런 균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한테 갖춰져 있는 본성인 덕德, 이것이 상락아정[常樂我淨]. 무한한 공덕인데, 간추리면 영생불멸하고[常] 또는 락[樂]이라, 위없이 완벽한 행복이고, 또는 아[我]라, 모두를 다 알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신통자재神通自在한 지혜를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